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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하는 사이> 전시 리뷰글

∣∣∣∣, ╋, ☒ : 사이에 있기―가로지르기―사이에 있기  -콘노 유키

모든 미술 작품은 과정을 동반한다. 신의 힘으로 출현하는 경우에도 신이 전제되어야 하듯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제작 행위라는 과정을 거친 다음 결과물로 등장한다. 그다음으로 다른 과정이 주어지는데, 이를 (넓은 의미의) 수용 과정이라 부를 수 있다. 우리는 감상 행위를 통해서 작품을 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그 과정에 오해와 착각도 생기며 밈처럼 다른 의도로 소비되어 원래 맥락을 벗어나는 경우 또한 거쳐 간다. 두 과정을 나란히 놓고 볼 때, 제작 과정 이 불가역적인 한편, 수용 과정은 다양한 통로가 있으며 이에 따라 다양한 변수를 고려할 수 있다. 두 과정에서 우리는 힘을 행사하는 주체를 상정할 수 있는데, 전자의 경우 작가를, 그리고 후자의 경우 수용자를 상정할 수 있다. 두 입장을 비교할 때, 어떻게 보면 전자는 후자보다 가능성이 폐쇄된 것처럼 보인다. 여러 위치에 개입할 수 있는 다각도적인 생각은 물론, 2차 창작이나 ‘저자의 죽음’이라는 말로 설명된 바와 같이, 지나친 경우 수용이 곧 창작 행위로 기능하면 서 제작 과정을 압도하게 되었다.

 

작품의 제작 과정은 수용자에게 그 자체로 전달력이 덜할까? 그 과정을 가시화하려면 일종의 딜레마를 겪게 된다. 제작 과정 가시화의 방법 중 하나는 작가의 내면적 고백이다. 작가의 의도가 어떻게 담겼는지, 그리고 어떤 기술을 통해서 작품이 제작되었는지, 일종의 메이킹 다큐멘터리와 같은 폭로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때 의도나 의미가 중요시되는 바람에, 전시장에서 작품은 기호처럼 읽히게 되면서 최소한의 수용 과정, 바꿔 말해 감상 행위에 가까운 태도 또한 억제해버린다. 제작 과정 가시화의 또 다른 방법은 작품 자체를 과정으로 삼는 일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 즉 ON AIR 적 상황이 형태를 짓는 상황이다. 퍼포먼스나 행위예술가 그렇듯이 작가는 시나리오처럼 계획을 세워 그 상황에 몸소 개입한다. 그런데 이때 수용자로서는 그것이 작품인지 아닌지 판별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이때 제작 과정은 작품이라는 결과물=성과로 인지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작품이라는 대상이기 전에 하나의 상황으로 지각되며, 따라서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과정보다는 어떤 일 또는 사건으로 인식된다.

 

작품이라는 중심축을 바탕으로 생각해 볼 때, 제작 과정의 가시화는 이처럼 난감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수용자의 지나친 소비를 방지하고, 나아가 내면적 고백이나 단순한 일로 여겨지지 않기 위해서 ‘작품’은 어떻게 과정으로 제시될 수 있을까. 사실 여기까지 분석한 과정, 말하자면 제작 과정과 수용 과정, 그리고 내면을 드러내거나 상황 자체를 만드는 과정은 분리될 운명에 반드시 처해 있는 것은 아니다. 작품에 네 가지 과정을 교차시켜, 응축하고 또 풀어놓는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김우진의 개인전 «소화하는 사이»에서 작품은 중심축으로, 말하자면 앞서 말한 네 개의 과정으로 전개될 교차망으로 작동한다. 이번 전시에서 강조된 작품의 물성은 젖고 또 마르기 쉬운 휴지라는 재료를 통해서 전개된다. 물방울이 떨어지고 휴지에 닿아 흘러 젖는 <소화하는 시간>, 같은 재료로 구성된 <다른 둘>, 그리고 얇은 막으로 겹겹이 감싸지만 부분부분 밑의 옹기토가 보이는 <a a’ a’’>을 볼 때, 대상인 작품에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휴지가 젖고 또 마르면서 형태는 크게 변하지 않거나, 제목을 읽고 변형이 가해지는 같은 재료의 오브제, 그리고 전시 공간의 흰색 벽처럼 모든 것을 가리지 않고 배후에 다른 물질을 숨겨놓은 상태로 노출되는 작품은, 키네틱 아트나 시나리오를 동원하여 지금 특정 상황을 만드는 주체로 나타나는 퍼포먼스와 다른 방식으로 과정을 새겨놓아 이를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된 작품은 언뜻 보면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매달린 공>(1930-31)에서 시각적 비유로 나타나는 진동(pulse)과 비슷하다. 그러나 펄스가 성적 메타포―단순한 해석은 물론, 성적 양가성으로 이미지가 전환하는 경우 또한 마찬가지다―로 작동된 것과 달리, 김우진의 작품은 진동을 앞서 말한 네 가지 과정 바꿔 말해 경로를 서로 작동시킨다. 제작 과정과 수용 과정, 그리고 내면을 드러내거나 상황 자체를 만드는 과정은 작품을 교차로 삼아 전개된다. 그의 작품에서 제작 과정은 물성의 변화, 즉 젖고 마르기의 반복으로 나타나고, (이어서) 수용 과정은 작품 물성에 대한 변질적인 측면으로, (이어서) 같은 재료로 구성된 대상이 제목에 “다르다”라고 언급되는 창작자의 설명은 (이어)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외부적 힘을 상황으로 설정-세팅한다. 앞서 언급한 이 네 가지 과정은 작품 및 전시를 하나의 중심축으로 세워볼 때, 이 중심을 기점으로 다른 과정으로 향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작품에서 과정을 가시화하는 일은 작품 자체나 창작자의 고백 중 한편으로 경도되거나, 의도된 상황의 전개나 감상자의 주관을 동반한 분석 대상으로 따로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작품은 이 네 과정을 모이는 중심축과 이를 연결하여 전개하는 망으로 기능하며 또 존재한다.

 

네 과정의 중심축이면서 동시에 교차망으로 작동할 때, 작품은 각 과정에서 배후에 물러선 작동 요인을 불러 세울 뿐 만 아니라, 이어 연결될 통로를 만든다. 작가가 재료를 다루는 과정, 작가가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는 의도, 관람자의 주관적인 감상, 그리고 설정-세팅된 상황은 따로 놓일 통로가 아니라 작품을 통해 끌어모으고 또 작품으로 전개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에게 ‘과정으로서의 작품’은 네 개의 경로를 거쳐 갈 수 있는, 보다 메타적인 과정으로 성립된다. 우리는 비탈길 구조물에서 굴러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구 형태의 작품에서 견고함을 떠올리며, 얇은 휴지와 지지체 사이(의 괴리)를 엿보고, 생김새뿐만 아니라 재료와 제작 방식이 같은 두 대상을 보고 무엇이 다를지 생각을 그려나간다. 교차망으로 작동하는 장 안에 서서 보면 <소화하는 시간>은 물이 떨어져 내려가는 기능만 하는 비탈길이 아니다. 그것은 상하좌우로 나누어진 서로 다른 차원을 연결하며, 더 넓게 작품을 위치시키는 연결망을 비유적으로 또 실제적으로 보여준다. 

1 <메달린 공>을 성적 양가성으로 분석한 내용에 대해서는 이브-알랭 부아, 로잘린드 E. 크라우스, 정연심 김정현, 1 안구 역 『비정형: 사용자 안내서』 중 「P: 부분 대상」 p.180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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